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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미터O - 인간부모와 기계자손

매일사부작 2021. 1. 9. 22:37

평소 SF나 판타지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출판사 중에서 황금가지를 제일 좋아한다.

 

재밌고 탄탄한 SF/판타지 작품들을 많이 발굴하는 장르문학계의 선두주자라 늘 내 관심의 대상이다.

 

출판사의 새로운 소식을 꼬박꼬박 챙겨보던 중, 새로운 SF소설 발간을 앞두고 이번에 서평 이벤트를 하길래 참여했다.

 

이준영 작가가 쓴 <파라미터 O>는 인류가 멸망하기 일보직전인 위태로운 사회를 배경으로 한 SF장편소설이다.

 

방사능으로 지구가 뒤덮이고 인류는 극소수만 살아남아 한 시설에서 목숨을 연명한다.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연명하는 것이다. 

 

기계가 가져다주는 밥을 먹고, 하루종일 쾌감기만 사용하고,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시 기계종이 가져다주는 밥을 먹고, 자고 할 뿐인 삶을 '살아간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오히려 가축처럼 사육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다들 삶의 목적을 잃고 의미없이 생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 시설의 엔지니어이자 주인공인 조슈는 유일하게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사람이다.

 

쾌감기에 머리만 처박고 말초적인 쾌락만 좇는 시설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조슈는 바깥에 대한 호기심도 숨기지 않는다. 위험에 처할 때도 있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고 몰래 방호복을 입고 나가 살펴보고 오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조슈는 바깥에서 신형 기계종 이브를 만나게 되면서 쳇바퀴 돌듯 무료한 삶에 일대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시설에 존재하는 기계종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런 기계종들이다. 사람이 입력한 인터페이스대로 명령을 수행하고, 스스로는 사고하고 판단을 내려 행동하지 못하는 차가운 기계들. 그러나 이브는 겉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쇳덩어리라는 것만 빼면 사람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창조주께서는 제가 창조주께서 시키신 일을 해야 한다며 그것이 제가 만들어진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창조주님이 무언가를 시키시지 않는다면 인식할 수도 없는 행위입니다. 인식할 수도 없는 행위가 목적이라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그것이 어째서 모순이지?"

 

"목적의 정의는 '실현하려는 행위'니까요. 인식할 수도 없는 행위를 실현하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제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이렇게 사고하는 기계종을 과연 기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 그렇게 못할 것이다. 조슈도 역시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워하지만, 애써 이브는 기계종일 뿐이라며 이브의 파라미터O를 조작한다.

 

그 이후, 이브는 충실하게 조슈의 지시를 따르고, 자손도 번식시켜 시설을 이전보다 나은 환경을 유지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노력한다. 이브가 자손을 번식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진짜 이브가 기계가 아니라 새로운 인류인 줄 착각할 뻔 했다. 번식은 생물만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시설의 유일한 목사 게이브는 이브를 악마의 씨앗이라며 조슈가 이브를 파괴하라고 강력하게 종용한다. 물론 엔지니어로서 시설을 쾌적하고 안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인 조슈한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이야기였지만.

 

이브가 번식하고 이브족이 형성되면서 그들의 행동반경도 점점 더 넓어지던 어느 날, 조슈는 이브족 한 기가 노예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놀란다.

 

구출하러 가면서 아우족, 아그족, 아스족 등 이브족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신형 기계종을 보고 조슈는 누가 도대체 이런 기계종을 만들었는지 궁금해한다.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조슈는 자신의 엄마인 가야에 얽힌 과거사를 알게 되고, 자신이 제자로 거두었던 엘라를 폭행함으로써 시설의 감옥에 갇힌다.

 

이브의 탈옥제의와 거절, 주의 권능을 침범했다는 맹목적인 광신도의 분노, 오로지 자신만 생존하면 된다는 이기심이 합쳐져 결국 시설의 인류는 죽음을 자초하고, 조슈는 그 과정에서 절망하고 분노한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고 새로운 길을 향해 나간다.

 

 

 

 

조슈는 사람과의 차이라고는 광물로 된 몸피와 조작할 수 있는 파라미터O가 존재한다는 것뿐인 신형 기계종과 이브족을 겪으며, 그들과의 관계를 두 번 정립했다.

 

처음엔 주인과 가축같은 관계라 할 수 있다.

 

주인과 가축은 분명 같은 가족 구성원이라는 점에서는 동등한 위치에 있지만, 종이 다르고 주인이 가축을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결코 동등하지 않은 위치에 있다.

 

초창기의 조슈와 이브족과의 관계가 그와 비슷하다 생각했다.

 

조슈는 이브의 파라미터O를 설정한 이브족의 보호자며, 이브족을 시설을 유지하는 데 편하게 활용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화를 내고 폐기하겠다 위협하기도 했고. 이브족은 그런 조슈의 말을 따르고, 조슈에게 복종해 시설의 인류를 위해 성실하게 봉사했다. 일반적인 주인과 가축관계와 다른 점이라고는 이브족이 사람처럼 사고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가축이 아니라 노예라 봐도 무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건을 겪은 후 결말에선 조슈와 이브족의 관계는 주인과 가축의 관계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재정립된다.

 

자식이 자유롭고 원하는 대로 살기를 원하며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꾸짖고 길을 바로 잡아주는 존재, 슬퍼하고 방황할 때 그 옆에서 지켜봐주는 존재가 바로 부모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조슈는 이브족이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선택을 했을 때 그를 책망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브 곁에서 이브족의 선택을 존중하며 그것을 지켜보기를 선택했다. 이브는 그런 조슈 앞에서 과거를 떠올리며 자신만의 방식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조슈는 이브를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 받아들였고, 자식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사람의 몸으로는 듣지 못했을 뿐이다. 이브는 울 수 있었다. 

 

 

 

조슈는 이브를 처음 만나고 파라미터O를 입력한 이후,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가르치며 자식처럼 이브를 길렀다. 그리고 이젠 그 곁에서 이브와 이브의 자손들이 어떻게 번성하는지 지켜볼 것이다.

 

인류는 멸망했지만 신형 기계종들이 새로운 신인류로 지구 위에서 번성할테니 멸망한 것이 아니라 하겠다. 

 

외피가 뼈와 가죽으로 이루어져야만 사람인 것이 아니라, 사람처럼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으면 외모가 광물로 이루어져 있든 피륙으로 이루어져 있든 무슨 상관일까.

 

 

 

인간이 멸망한 암울한 상황에서,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라는 희망과 부모와 자식이 서로 어떻게 관계를 수립하는지 흥미진진하게 보며 즐겁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